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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어둠을 동경한다는 것.


  내가 우울한 정서가 지배적인 문화상품을 선호하게 된 건 전적으로 유년기 때 봤던 홍콩영화들 때문이다. 그때 본 작품들은 중국으로의 반환이라는 시대적 상황의 영향 아래에 있어서 대체로 어두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 오우삼으로 대표되는 홍콩느와르부터 왕가위의 이상한(?) 멜로물들까지 다들 종말이 머지 않았다는 걸 기정사실화한 채 오늘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였다. 내일이 없는 현실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러한 무지 덕분에 유년기의 나는 외로움과 고통, 절망을 그리는 이야기들을 순수한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할 수 있었다.





  <영웅본색>과 <중경삼림>, 이 2편을 자기 인생의 홍콩영화로 뽑는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는 적룡, 주윤발 형님들과 장국영 오빠(!!)가 나오는 사나이들의 총싸움이야기, 다른 하나는 두 커플의 만남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사랑이야기(를 가장한 홍콩이라는 도시 이야기)이다. 갱들이 나오는 액션물과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멜로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장르들이지만, 이 두 작품은 묘하게 닮았다. 홍콩이라는 공간, 중국으로의 반환 직전이라는 시간, 이 2가지 조건 안에서는 어떤 장르로 영화를 찍어도 닮을 수밖에 없는 걸까?

  지금은 좀 다르지만, 이 영화를 볼 당시의 어린 내가 이 영화들에 반했던 이유는 한 마디로 '존나게 멋있으니까!'였다. <영웅본색>의 영어제목은 'A BETTER TOMORROW'인데, 반어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결국 1편에선 주윤발이, 2편에선 장국영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어린 나는 그 죽음들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았다.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죽음에 이상한 종류의 쾌감을 느꼈다. 그렇게 죽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주제넘게도 '하루를 살아도 영웅처럼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당시엔 성당을 되게 열심히 다니고 있던 시절이니, 쟤네들은 천국에 갔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많은 살인을 한 자들이 천국에 갔을까?) 




  <영웅본색>시리즈하면 다들 떠올리는 한 남자, 바로 주윤발이다. 이쑤시개와 트렌치 코트, 쌍권총, 그리고 느끼한 미소. 2탄에서는 윤발이형이 중심인물이지만, 1편에선 사실 살짝 조연 삘이 나는 인물이다. 1편은 기본적으로 적룡과 장국영, 이 형제의 얘기이고 주윤발은 적룡을 각성시키고 장국영에게 형제애에 대해 잔소리를 하는 역할을 맡은 보조자 정도이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주윤발에 열광을 한 것이다. 그래서 오우삼이 2편에서 다소 무리한 설정을 통해 그를 또 다시 불러낸 것이 아닐까?

  왜 주윤발에 열광했을까? 캐릭터의 힘? 아니면 주윤발의 스타성? 내가 볼 때 가장 큰 것은 '소마'라는 인물의 가치관이었다. 모두가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순응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왕년에 잘 나갔던 적룡 형님도 이제는 알바를 뛰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혼자 전근대적인 윤리에 따라 살아가는 못말리는 고집쟁이가 바로 '소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그의 전근대성이 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들 소마를 따라 이쑤시개를 물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현실에선? 시대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은, 혹은 시대에 뒤쳐진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은 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쿨한 것이 아니다. 다원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업데이트 되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쿨한 전근대성도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걸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반갑다. 그러나 아무리 쿨한 전근대성도 그것을 가진 주위 인물들의 기분을 잠시 좋게 해줄뿐 결국 당사자에게는 독으로 작용한다. 물론 <영웅본색>의 감독 오우삼도 그런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어른이고, 그렇기 때문에 1편의 마지막에서 소마를 죽인 것이다. 그러나 소마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소마의 쿨한 태도가 가진 양면성에 대해 깨달을 수 없었다. 소마가 죽는 장면이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좋은 영화는 멋있는 장면이 없는 영화라고 하나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놈이 나 혼자는 아니었나보다.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 속 '마크'라는 녀석도 철모르고 이쑤시개 물고 다니다가 그런 꼴을 당한다. 쯧쯧.

  <중경삼림>의 첫 번째 에피소드. 금성무가 여자에게 차인 후 무지하게 찌질거리다가 마약파는 임청하를 만나서 아주 잠깐의 교감을 한다는 얘기. 금성무의 찌질거림이 무척 창의적이기는 했으나, 찌질한 것은 말 그대로 찌질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때 금성무의 짓들 -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달리기를 졸라게 해서 온 몸의 수분을 완전히 빼는 거나 전여자친구의 생일과 같은 날짜의 유통기한을 가진 통조림들을 왕창 먹는 것을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서른 한 살이 된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여자한테 차인 후에는 항상 <중경삼림>을 본다. 이런 미친...





  임청하와 금성무는 어찌저찌 같은 호텔에서 잠을 자는데 둘은 섹스를 하지 않는다. 하루종일 하이힐을 신고 갱들로부터 도주를 한 임청하가 지쳐 잠이 들자 금성무는 살며시 다가가 그녀의 하이힐을 벗겨준다. 그 장면이 참으로 멋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현실에서는 남자가 그런 상황에서 섹스를 안 하면 병신 소리를 들을 것이다. 우울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열고 잠깐의 교감을 통해 위안을 느낀다는 설정은 참으로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참으로 비현실적이다. 역시 영화는 영화인 것이다.

  모든 영화감독들이 죄다 홍상수처럼 작품활동을 한다면 멀티플렉스에는 파리만 날릴 것이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피사체란 피사체는 죄다 미화해버리는 영화들을 보며 살 것이다. 그러므로 극장에서 나올 때엔 항상 제대로 '킥'을 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영화는 결국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부한 것이고 나 역시 그걸 알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도 전혀 추구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동경심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멜로영화 주인공들이 차인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 하는 걸 지켜보면 이상하게 그 찌질함이 멋있어보이고, 느와르 역시 주인공의 고독하고 치열한 삶이 쿨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현실 속의 브리짓 존스들은 살을 빼고 얼굴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절대 콜린 퍼스같은 남자를 만날 수 없고, 현실 속의 권총은 절대로 총알이 무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상은 누구보고 들으라고 충고하는 얘기가 아니라 2010년 9월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마인드를 정리해 본 것이다. 오늘 나는 '이제는 극장에서 나와 현실 속으로 뛰어들 때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잠에 들테고, 아침이 밝아오면 내 핸드폰 모닝콜 음악인 에디뜨 삐아쁘의 'Non Je Ne Regrette Rien'을 들으면서 깨어나 기분좋게 조깅을 하며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엇!, 가만, 이게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이 <인셉션>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한 '진짜' 메시지였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