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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영화보고 책보고


  영화와 책, 음악 이런 걸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좋아한다 혹은 사랑한다고 말을 하려면은 그 대상과 함께 하기 위해 치뤘던 기회비용이 굉장히 거대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 기회비용의 크기에 따라 사랑을 측정할 수 있지 않나?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영화나 음악, 문학 등 예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존나 보잘 것 없다. 내가 키가 크고 잘 생기고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과연 이런 거에 시간을 쓸까? 안 쓸 것 같다. 여자 따먹으러 다니느라 정신없겠지. 따라서 이런 건 사랑은 아니다. 그냥 nerd 타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거 밖에 할 게 없는 거다. 일종의 도피인 셈이다. 도피가 나쁜 거라고는 하지만 그건 내 죄가 아니다. 내가 나로 태어난 걸 난 선택한 적이 없거든.

  비문증 때문에 맑은 날 밖에 나가기가 꺼려진다. 밤거리는 괜찮지만. 실내에서 영화보고 책보는 게 제일 돈이 안 들고 시간 잘 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영화를 보다가 지겨워지면 책을 읽고 또 책도 지겨워지면 음악도...는 아니고 음악은 그냥 틀어놓는다.

  어제 밤에는 코엔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와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을 보았다. <그 남자는...>은 군대 있을 때 부대 내 도서관의 DVD로 보았는데 오늘 보니 거의 처음 보는 영화 같았다. 나의 기억력이 이렇게 형편없다. 코엔 형제 영화답게 존나 골때리는 영화다. 굉장히 평범한 영화인 척하면서 진행되다가 20분 정도가 흐르면 사람의 이목을 확 잡는다. 그러다가 영화 러닝타임이 아직 남았는데 벌써 끝나려고 하나 싶다가 완전히 골때린 라스트를 보여준다. 영화 보고 나서 영화의 제목 The man who wasn't there에 대해 한참 생각했다. 그 주인공이 있으나마나한 그런 존재였다는 건가? 뭐 대부분의 인간들이 다 있으나마나한 존재니까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라쇼몽>에서 인상깊었던 건 그 도적 우두머리의 증언 segment에서 불었던 바람이었다. 바람이 싹 부는 게 그게 참 기억에 남는다. 그 바람 때문에 도적 우두머리가 부부를 덮치면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쿠로사와 아키라 속의 바람에 삘이 꽂힌 어느 프랑스 평론가는 지구를 반바퀴 돌아 일본까지 가서 그 바람의 비밀을 캐려고 갔다더라. 정성일 평론가의 책에서 봤다. 대단한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같으면 DVD 나올 때를 기다려서 서플먼트로 확인할 거 같은데... 기술의 발전이란 게 인간의 열정이 끼어들 여지를 안 주는 것 같다.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에서 보면 그 유명한 스칼렛 요한슨이 나온다. 요한슨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치는데, 그 음악의 리듬(이랄 게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이 이 영화의 편집 리듬과 닮은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넷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죄다 받아놓고 플레이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들의 이름과 각 트랙의 명칭을 보고 기가 죽는다. 누군가는 이런 걸 듣기만 해도 저 엄청나게 긴 트랙이름과 피아니스트 이름을 줄줄 말하겠지. 근데 뭐 별로 부럽진 않다. 그게 뭐 여자 꼬실 때나 쓸모가 있겠지. 근데 요즘에도 그런 걸로 꼬셔지는 여자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