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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해리 파괴하기


  우디 앨런의 <해리 파괴하기>를 봤다. 영화 정말 좋다. 우디 앨런의 말빨이야 원래부터 유명하고, 이 영화에도 정말 죽이는 대사들이 많다. 썰도 좋았지만, 영화적인 형식미도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주 괜찮았다. 근데 영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 영화의 주인공 해리는 꽤 유명한 소설가인데 자기 지인들의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모습을 아주 시니컬한 투의 글로 풀어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당연히 주위 사람들이 무지하게 싫어한다. 우연찮게 이런 영화를 본 오늘 아침, 지인이 자신의 책을 보고 이러저러한 얘기를 했다는 소설가 은희경씨의 tweet을 읽었다. 하하하.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는 랩탑을 들고 나타났다. 나와의
대화 중에도 틈틈이 타이핑을 하길래 뭐를 하냐고 물어봤더니 소설 같은 걸 쓴다고 했다. 아마도 그녀의 취향 같은 걸 고려해보았을 때 연애담일 것 같은데, 되게 감동적으로 따뜻하고 황순원의 <소나기>같은 아주 맑은 그런 정서와는 전혀 거리가 먼, (내가 혐오하는) 청담동 커리어 우먼 정서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 부류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 범죄소설이나 사이코패스 관련 논픽션에 열광하는 나로서는 그녀의 취향에 대해 뭐라고 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 스쳐간 인연들에 대해 '논'하는 방식만큼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다단지 자기에게 푹 빠졌었다고 혹은 자신의 '작업'에 넘어왔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지 않나, 라는 거지. 

  그것과는 별도로,
혹시나 그녀의 미완성 소설에 나도 나올까, 나온다면 어떻게 나올 지 무지하게 궁금했었는데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느 쪽도 별로 나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니까. 일단 나온다면 아마도 되게 치졸하고 고지식하고 지루한 남자로 묘사될 것 같아서 별로다(보통 여류작가의 연애담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놈으로 그려지는 캐릭터와 나란 놈은 상극이니까). 나온다고 해도 아마 비중이 되게 작을 것이다. 나에게 연애는 월드컵이었지만 그녀에게 연애는 EPL이었으니까, 내가 주요 인물 중 한 명이기를 바라긴 힘들다. 그리고 그럴 거야, 하면서도 막상 나의 비중이 매우 작다는 걸 직접 확인한다면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만약 등장하지 않는다면. 또 안 나온 사실 자체에 나로선 되게 굴욕이다. 결론은, 모르는 게 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의 글솜씨가 별로라서 출판화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사실. 근데 이것도 꽤 예전에 그녀가 미니홈피에 쓴 글들을 보고 판단한 것이니까 또 모르겠다. 내가 못 본 동안 그녀의 글솜씨가 별로 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