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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테스토스테론


  요즘 다시 UFC를 즐겨 보기 시작했다. MMA를 안 본지가 거의 3~4년 정도 되었다. 한동안 안 보던 킬링타임용 컨텐츠를 다시 보게 된 정도의, 아주 미세한 변화에 불과하지만 생각보다 일상생활에 파급력이 있다. 헬스장을 가면 아무래도 트레이닝을 전보다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어서 빨리 강한 육체를 얻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이 생기니까. 그리고 안 좋은 옛 기억이 다시 떠오를 때에는 쓸데없이 감상에 잠기기보단 좀 공격적인 대응을 하게 된다(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예전보단 나은 것 같다). 군 제대 후 약 2~3년간 MMA도 참 열심히 보고 운동도 되게 열심히 했었다. 오버트레이닝을 하다가 자주 다치기도 했지만 확실히 내 인생에서 가장 육체적으로 건강했었다. 사실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할 시기였는데 도서관에선 운동으로부터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주로 수면으로 시간을 보냈다. 되게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시간들이었는데 행복하다면 행복했던 시기였다.
  남성호르몬이 주는 특유의 평온함이 있는 거 같다. 남성호르몬과 평온함, 되게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나에겐 그게 오히려 평온했다. 항상 업되어 있고 살짝 흥분되어 있는 상태, 이와 더불어 아주 심플하지만 확고한 목표의식의 설정이 주는 정신적 평온함이 있었다. 운동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자세도 무지하게 심플했었던 시기였다. 읽고 듣고 보는 것도 센 것, 강한 것, 아주 객관적인 정보를 주는 산문류였고, 센치한 음악이나 소설, 시 같은 건 쳐다도 안 봤다. 인간관계에서도 모 아니면 도였고, 지난 기억에 힘들어하면서 잠을 설치지도 않았다. 감수성이 급속히 무뎌졌던 복학생의 시간들이 나에게는 굉장히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성장'이라고 부르는 변화들은 대체로 어떤 것에 대한 무뎌짐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참으로 우스운 게 무뎌지는 모습을 보고 '어른됐다'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작은 것에도 일희일비했던 예민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 또한 가지고 있다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청춘을 잘 모르지만, 나에겐 사실 내가 예민했던 시절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예민해지자 내 주위에서 오는 모든 자극이 상처였다. 지금의 무딘 상태가 어쩌면 최상일지도. 아쉬운 마음도 있다. 극도의 희열 또한 예민한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데 그런 면에선 무뎌진 게 슬프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의 인생에겐 그런 희열은 허용되지 않는 것 같다. 미련을 접고 이젠 무뎌짐의 세계로 들어가 남자로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