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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비가 존나게 오는 새벽 4시


  후유~ 겨우 겨우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가 요 며칠간의 방황으로 인해 다시 야행성으로 돌아왔다. 비오는 새벽 4시에 침대에 누운 사람이 잠이 올 리가 없다. 온통 어두컴컴한 생각들이 몸 전체를 감싸고 돌아서 도저히 기분좋게 잠을 청할 수가 없다. 다시 컴퓨터에 앉아 글이나 끄적거린다. 


  방금 잠이 무지하게 안 와서 밖에 나가서 바람을 쫌 쐐고 왔다. 평소에는 웬만한 비는 그냥 맞고 다니지만 오늘 밤의 비를 맞았다가는 팬티까지 젖을 것 같아서 우산을 찾았다. 문 옆에 놓여있는 3개의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에 있는 남색 우산이 내가 직접 구입한 것이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버버리 무늬의 우산은 대학동기 Y군이 우리 집에 왔다가 놓고 간 것이고, 왼쪽의 노란 우산은 내가 좋아했던 어떤 여성이 두고 간 것이다. 그녀가 이 우산을 내 방에 두고 간 게 벌써 2년전이고, 그녀가 내 곁을 떠난 것은 1년 반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걸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만났던 여인들의 징표들을 컬렉션화(化)하는 용자들도 있다지만, 나는 나 자신의 정신력이 아주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별 통보를 받은 즉시 내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정서적인 환기를 불러일으킬만한 물건들을 모조리 찾아낸 후 싹 다 버렸다. 하지만 이 우산만큼은 끝내 버리지 못했는데 이 우산 위에 그려진 귀여운 척하는 토끼의 표정이 이상하게 애처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쓰레기통에 놓고 올려고 하다가 결국 버리지 못하고 다시 문 옆에 두었다. 그렇다고 이걸 돌려줄 수도 없고(이제 꽤나 성숙한 티가 나는 직장인이 된 그녀가 이런 우산을 가지고 다닐 리는 없을 테니까).

  헤어진 후에도 꽤 오랫동안 나는 그녀의 영향권 안에서 살았다. 굳이 '영향권 안에 살았다'라는 요상망칙한 표현을 쓴 이유는 적확한 서술어를 찾지 못해서이다. 그저 폼나게 '그리워했다' 정도로만 표현하기엔 내가 혼자 그리워하는 정도를 넘어 그녀를 너무나 귀찮게 했었고, 그렇다고 '따라다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내가 그녀에게 한 액션들의 과감성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에 알맞지 않다.

  아무튼 그렇게 세월아 내월아 보내다가 이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주 연락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늦은 밤이 되면 그녀에 대한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인데 그래도 그 용하다는 세월의 힘 덕분에 그럭저럭 참을만은 하다. 

  이제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그녀와 나는 잘 되기가 되게 힘든 사이였다. (적어도 나의 관점에서는) 통하는 부분들이 꽤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연애관이었다. 그녀는 자칭 '오늘주의자'이다. 오늘만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자신이 현재 직면해있는 순간의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다. 나는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의 '카르페 디엠'을 떠올리며 참으로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친구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여성을 좋아하는 일이 꽤나 힘든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주의자'에게는 현재만이 중요한 것인데 아무리 연인관계라고 해도 상대방과 항상 꼭 붙어서 그 사람의 현재가 되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주의자에게 오늘 만날 수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신뢰라든가 믿음같은 것을 강요할 수가 없다.

 
결국 잠깐 서로가 떨어져 지내야하는 상황이 되자 그녀와 나의 관계는 급속도로 식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는 또 나름대로의 해법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그녀의 '오늘'이 되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 역시 나만의 '오늘'을 찾는 것, 그리고 다시 그녀와 내가 서로의 '오늘'이 되어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주의자'가 아니라서 그런 해법을 알았더라도 도저히 실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쾌나 쿨한 척하지만 알고 보면 전근대적인 연애관을 여전히 갖고 사는 내가 그런 과정을 견뎌내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크리스마스를 몇 일 앞둔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가치관을 수정하라고 강요하는 나의 행동을 참지 못하고 정리해고 통보를 날렸다.

  그녀와 이별하던 시기에 나는 첫 직장에서 막 사표를 제출한 상황이었다. 백수에다가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없는 나로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잡생각을 하며 보냈고 그 주제의 대부분은 바로 그녀였다. 그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왜 그녀는 하필 나를 선택했을까?'이다. 그녀는 오늘주의자이다. 따라서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말은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시제로 이루어진 문장만이 그녀에게 의미있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왜 나처럼 '안전한 사람'를 만나는 거지? 

  많은 여자들이 '나쁜 남자'들한테 수없이 마음을 다치고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수더분한 남자들에게 투항을 하여 미래를 보장받는다고 한다. 젊었을 때 자극적인 인스턴트 식품을 무지하게 즐기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몸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 잡곡밥이나 보신용 식품을 챙겨먹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녀는 자극적인 인스턴트 식품을 먹어도 탈이 안 나는 사람이다. 나는 외모도 그냥 그렇고 조건도 그냥 그렇고, 정말로 평범한 사람이다. 미덕이라고는 정직하다는 점, 안전하다는 점, 믿을 수 있다는 점 정도이다. 잡곡밥 같은 남자인 셈이다. 자신만을 계속 사랑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재미있고 잘 생기고 키가 크고 돈 많은 남자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녀는 꽤나 외모도 괜찮고 기타 스펙도 수준급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별 후에도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자주 있었지만 차마 저런 의문점을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없어보일 것 같아서이다.
 
  그러다가 내 마음의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갑자기 뭉쳐져 식도를 타고 올라오던 어느 날, 나는 그녀가 살던 동네로 달려가서 무작정 그녀를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횡설수설을 하다가 말미에는 참지 못하고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라는 얘기를 했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녀는 나를 지하철역으로 데려다주면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의 마음이 계속 지속될 거라는 거, 나한테는 그게 메리트가 안 된다는 거 알지? 그렇다면 내가 너를 만나는 게 어떤 메리트가 있는 거지?"

  나는 뭔가 말을 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몇 가지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 없는 답변이었다. 그 질문에 내가 적절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건 당연한 거다. 그 질문은 내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봐 친구, 그게 제일 궁금한 사람은 바로 나라고!!'


  나는 그녀가 왜 나에게 왔는지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왜 나를 떠났는지도 알 수가 없다(나의 어떤 행동이, 어떤 언행이, 어떤 성격이 그녀를 실망시켰는지는 안다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 같다). 더불어, 다시 그녀를 찾을 수 있는 방법 또한 모른다. "Easy come easy go"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은 쉽게 얻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얻은 것인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다. 아무거나 막 눌러서 운이 좋게 비밀번호를 맞추었는데 사실은 내가 뭘 눌러서 문이 열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다시 문이 닫히자 암담해지는 상황인 것이다. 좀 슬픈 가설이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이 관계가 그녀와 나만 참여하는 2인용 게임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건 진짜 좀 슬픈데.

  아무튼 다 끝난 건데도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잊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