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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내일 향박작계를 가야 하는 착한 어린이 워너비의 이야기


  새벽 1시가 넘어가면 절망이라는 이름의 폐수가 내 머리 속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2시가 넘어가면 이 더러운 것들이 뇌를 가득 채운다. 이때쯤 머리를 갈라보면 아마 검은색 빛깔의 뇌수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2시 반이 넘어가면 얼마 전까지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던 놈이 건방지게도 또 다시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시작한다. 그 외에도 인생을 참 잘못 살았구나, 나에게 미래는 없는 것 같다, 평생을 이 지겨운 반복 속에서 보내다가 사라지겠지 등등 우울함 관련 국가대표급 클리셰들로 구성된 진부한 막장 모노드라마가 눈 앞에 플레이된다.

  밤늦게까지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던 때에는 내가 야행성 인간이라는 점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이제는 그게 내 인생을 참담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요소이다. 한 때는 삶의 질을 위해서 절대로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이제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필히 일찍 잠을 자는 습관을 들여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찍 잠이 들어야만 조금씩 나의 몸과 마음이 착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밤엔 소고기를 잔뜩 사서 다 구워먹고 포만감을 느끼며 기분좋게 침대에 누웠는데 왜 전혀 잠이 오지 않는 거냐!! 올 초에는 밤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자는 생각에 24시간 헬스장을 등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는 또 12시가 되면 잠이 아주 잘 와서 새벽에 헬스장을 간 횟수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조명을 어둡게 한 후 라디오를 켰는데 선곡들이 하나같이 기가 막히다. '글루미 선데이'같은 노래가 나오질 않나. 지금은 '너를 잊지 못하고 있는....'이라는 가사의 노래('옥수사진관'이라는 밴드의 '푸른 날'이란다)가 플레이되고 있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늦은 밤이니까 청취자들 잘 자라고 조용한 노래를 틀어주는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이런 노래가 더욱 수면에 방해된다.
 
  내일은 향박작계를 가야 하는데 휴우.... 2007년 초에 받았던 예비군 훈련이 기억난다. 그녀에게 처음 고백을 했다가 시원하게 뺀찌를 먹고 완전 우울해져서 받았던 그 훈련. 군복은 개구리인데 표정은 신병의 그것이었지. 너무나 슬프고 외로워서 주위 친구들에게 쫙 문자를 돌렸었지. 답문이 몇 개 안 왔던 걸로 기억난다. 그녀가 캐나다행을 결정한 직후 받았던 예비군 훈련도 있구나. 마포교장에서 우연찮게 유학생활을 하는 연인을 둔 친구를 만났고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롱디'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땐 녀석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남 얘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작년 여름 그녀와 완전히 갈라진 후 갔던 예비군 훈련. 그 날은 날씨가 엄청 좋았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면서 무라카미 류의 '오디션'을 읽었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았던 걸로 기억난다. 그날 난 그 사람 없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을 얻었지. 그리고 올해 다시 그녀에게 덤볐다가 또 다시 거하게 뺀찌를 먹고 자존심까지 무지하게 다쳤고 이제와 뒤늦게 어지럽혀진 내 인생을 수습하려고 아둥바둥거리는 나에게 다시 군복을 입어야 할 시간이 왔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기말고사나 방학이 인생의 표지판같은 역할을 해주었는데, 졸업 후에는 예비군 훈련이 인생의 한 챕터가 넘어가는 걸 알려주는 알람이다. 올해 나는 3번 정도 예비군 훈련을 연기했었다. 내일 가게 된다면 올해 예비군 훈련을 처음 가는 것이다. 내일은 꼭 가야겠다. 내 인생의 다음 장이 열렸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근데 너무 빡세게는 안 했으면... 



알았어 이 색기들아, 간다고. 가면 될 거 아냐.